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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승연이의 탄생 기념 동화 - 마누라 (2000년11월1일)

by 소꾸호 2000.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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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이 간질간질하여 눈을 떠보니 햇살이 따사롭게 비치고 있었습니다.
“승연아, 아침이야. 어서 일어나.”
햇님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습니다.
승연이는 며칠 째 길을 떠나고 있습니다. 목적지가 어딘지, 이유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가고 있습니다. 배가 고프면 꽃잎에 맺힌 이슬을 먹고, 심심하면 새들과 나비들과 함께 놀았습니다.
오늘도 따스한 햇빛을 받으며 걷다 보니 빨간 장미 덩굴을 만났습니다.
“꽃아, 안녕. 나는 현승연이라고 해. 너는 빨간색 장미로구나. 우린 친구지?”
장미들이 까르르 웃으며 승연이를 맞아주었습니다.
“승연아, 어서 와. 우리랑 숨바꼭질 할까?”
가위, 바위, 보!! 술래 장미가 정해졌습니다.
승연이는 꼭꼭 숨으려고 장미 덩굴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꼭꼭 숨어라.
한참을 덩굴 속으로 걸어 들어 가다보니 저 멀리서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보였습니다.
“어, 저게 뭘까?”
그것은 바로 투명하게 빛나는 유리 구슬이었어요. 그 속에는 승연이의 얼굴도 있고, 장미들도 있고, 파란 하늘도 있었습니다.
“정말 예쁘고 신기하다. 하지만 내 것이 아니니까 가지고 가면 안되겠지?”
장미들과 재미있게 숨바꼭질을 하다보니 점심 때가 되었어요.
“아쉽지만 그만 헤어져야겠어. 우리 다시 만나자.”
승연이는 슬퍼하는 장미들을 뒤로 하고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한참을 걷다가 이상한 느낌에 뒤를 돌아보니 유리 구슬이 승연이를 졸졸 따라오는 것이었어요. 왼쪽으로 가면 왼쪽으로 따라오고, 천천히 가면 천천히 따라왔습니다. 할 수 없이 승연이는 유리 구슬에게 다가갔습니다.
“구슬아, 너는 집이 어디니? 왜 나를 따라 오는거니?”
“승연아, 나는 너랑 같이 가고 싶어.”
“난 어디로 가야 할 지 몰라.”
“그래도 널 따라 갈래. 널 처음 봤을 때, 그토록 오래 장미 덩굴 속에서 기다려 온 것이 널 만나기 위한 것이라는 걸 알았어. 날 데려가 줘. 승연아.”
승연이는 할 수 없이 유리 구슬을 손에 올려 놓았습니다.
“그럼, 우리 친구하자. 너랑 함께 가면 심심하지 않을거야.”

한참을 가다 보니 숲 속 나무 등걸에 토끼 세 마리가 앉아 있었어요. 그런데 모두 풀이 죽어서 시무룩해 있는 거예요.
“토끼야, 안녕. 나는 현승연이라고 해. 너는 깡충깡충 토끼로구나. 근데 왜 그러니?”
“정말 심심해, 승연아. 앉아 있으니 하품만 나오는걸.”
“그럼 내가 노래 불러 줄게.”
산토끼 토끼야 어디를 가느냐.
승연이는 손을 머리 위에 올리고 예쁘게 율동도 했어요.
“그 노래는 너무 많이 들어서 이젠 지겨워.”
토끼들은 손을 내저으며 일제히 승연이를 바라보았어요.
“그럼 어쩌지? 정말 큰일이네.”
그때 어디선가 승연아, 승연아, 부르는 소리가 들렸어요.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주머니 속의 구슬을 발견했어요.
“승연아, 나와 함께 놀면 되잖아.”
“아, 맞아. 유리 구슬아, 네가 있었지?”
승연이는 토끼들에게 유리 구슬을 보여줬어요. 이제는 거의 울 듯하던 토끼들이 유리 구슬을 보자마자 반짝반짝 눈을 빛냈어요. 와! 신난다.
승연이는 기뻐하는 토끼들과 함께 구슬 서로 던지고 받기, 높이 올려서 받기, 나뭇가지를 땅바닥에 세워 놓고 볼링하기 등등 재미있는 오후를 보냈어요.
나무 등걸에 앉아 쉬면서 토끼들이 말했어요.
“승연이 덕분에 참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어. 우리랑 놀아줘서 고마워, 승연아. 넌 정말 멋진 친구야.”
승연이는 쑥쓰러워서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습니다.
“자, 이제 난 그만 떠나야겠어. 안녕.”
유 리 구슬과 함께 승연이는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산을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붉은 놀 속에서 어슴프레한 태양을 보니 어쩐지 조금 슬픈 기분도 들었습니다. 하루종일 걸었더니 피곤하기도 해서 터덜터덜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울음 소리가 들렸습니다.
“엉엉, 어떡해. 엉엉엉.”
가까이 다가가 보니 강아지가 나무에 기대고 앉아 울고 있었어요.
“강아지야, 안녕. 나는 현승연이라고 해. 너는 멍멍 짖는 강아지로구나. 왜 울고 있니?”
“엉엉, 내가 가지고 놀던 연이 나뭇가지에 걸렸어. 아무리 잡아 당겨도 내려 오질 않아. 엉엉엉.”
승연이가 위를 쳐다보니 과연 높은 가지 위에 연이 걸려서 팔랑거리고 있었습니다.
“강아지야, 울지 마. 내가 한 번 올라가 볼게.”
방 금 전까지 너무 지쳐서 힘이 들었던 승연이였지만 강아지를 위해 힘을 냈습니다. 영차 영차! 하지만 나무를 기어 올라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겨우 올라갔나 싶었는데 주루룩 미끄러지기도 했고, 까칠까칠한 나무 껍질에 걸려 손에 생채기가 나기도 했어요. 그냥 내려가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울고 있는 강아지를 보니 연을 꼭 내려주고 싶었습니다. 영차 영차! 영차 영차!! 이마에서는 땀이 흘러내렸습니다. 날도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어요. 이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되는데, 승연이는 그 마지막 힘을 낼 수가 없었어요. 그때, 어디선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승연아, 착한 승연아. 나를 써봐.”
그것은 주머니 속의 구슬이었어요.
“하지만 구슬아, 너를 던지면 네가 아프잖아.”
“아니야. 네가 한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야. 내가 조금 아프더라도 강아지에게 연을 돌려줄 수 있다면 정말 기쁠거야.”
“그래, 그럼 구슬아. 조금만 참아.”
승연이는 구슬을 꺼내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연을 향해 힘껏 던졌어요. 연이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팔랑팔랑 아래로 춤을 추듯 내려 갔어요. 강아지가 기뻐서 멍멍 짖는 소리가 멀리 들렸습니다.
“승연아. 고마워. 넌 정말 멋진 친구야.”
밤이 깊어졌습니다. 승연이는 잠 잘 곳을 찾아 걷다가 동굴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저곳이 좋겠다.”
동굴 속에 들어가니 푹신한 털이 깔려 있었어요.
“오늘은 여기서 자야겠어. 아아악!”
누우려던 승연이는 소리를 지르고 말았어요. 바닥이 들썩이며 움직였거든요. 자세히 살펴보니 곰이 웅크리고 엎드려 있었어요.
“어휴, 정말 놀랐잖아, 곰돌아.”
“놀랐다면 미안해.”
“안녕, 나는 현승연이라고 해. 우리 친구할까?”
“좋아.”
“왜 그러고 있었니?”
“난 어둠이 무서워. 그래서 밤만 되면 이렇게 엎드려 있단다. 하지만 힘들어서 잠을 푹 잘 수가 없어.”
승연이는 곰돌이가 불쌍해 보였어요.
“내가 도와줄 수 없을까? 어떡하면 좋을까? 아! 그러면 되겠다. 곰돌아, 이리 와봐.”
승연이는 곰돌이의 손을 이끌고 동굴 밖으로 나왔어요.
“승연아, 난 싫어. 어두운 게 싫단 말이야.”
“곰돌아, 무서워 하지마. 내가 좋은 걸 보여줄게. 유리 구슬아, 나 좀 도와줘.”
승연이는 주머니에서 구슬을 꺼내 나무 등걸에 놓았어요. 잠시 후 달님에게서 나온 빛이 구슬에 닿아 점점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어요.
“달님, 우리 곰돌이를 위해 더 많은 빛을 내려 주세요.”
그 말을 듣고 달님은 더욱 환하게 미소지었어요.
“와, 환하다. 정말 환하다. 아침 같아. 나 이제 밤이 무섭지 않아.”
유리 구슬은 점점 환해져서 나무 등걸을, 동굴을, 주위의 나무들을 비추기 시작했어요. 곰돌이와 승연이는 은빛으로 빛나는 그 곳에서 춤을 추었어요.
곰 세 마리가 한 집에 있어. 아빠 곰, 엄마 곰, 애기 곰.
노래를 부르면서 말이예요. 하늘의 달님도 빙그레 웃으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똑, 똑, 똑, 후두두둑.
빗소리에 눈을 떴어요. 동굴 밖으로 비가 내리고 있었어요.
“승연아, 비가 온다. 너 꼭 가야 하니?
“응. 난 길을 떠나야 해. 어딘가 가야할 곳이 있어. 이제 다 온 것 같아.”
“그럼 이걸 쓰고 가.”
곰돌이가 나뭇잎 우산을 내밀었어요.
“고마워. 곰돌아. 널 잊지 않을게”
승연이는 다시 걸었습니다. 한 손에는 우산을 들고, 한 손에는 구슬을 들고.
“유리 구슬아. 너 덕분에 친구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었어.”
“아니야. 너의 착한 마음이 없었다면 할 수 없는 일들이었어. 그 마음 꼭 간직해.”
그냥 걷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승연이는 어딘가를 향해서 가고 있는 듯 느껴졌습니다.
“이상해. 내가 가야 할 곳이 이 근처 어딘가에 있는 것 같아. 그런 힘이 느껴져.”
그때였습니다.
손에서 구슬이 미끄러져서 굴러가기 시작했습니다.
“악, 승연아.”
“구슬아, 안돼. 구슬아, 이리 와.”
승연이는 구슬을 향해 뛰어갔습니다. 우산도 버려두고 빗줄기 속으로 달려갔습니다.
“안돼, 구슬아. 거긴 연못이야.”
굴러가던 구슬은 결국 연못에 빠져 버렸습니다.
“승연아, 승연아.”
“구슬아, 조금만 기다려. 내가 구해줄게.”
연못 속으로 들어간 승연이는 헤엄을 치며 구슬을 찾아 헤멨습니다. 비는 더욱 세차게 내려 승연이의 얼굴을 아프게 때렸습니다.
“구슬아, 어디 있니? 너 어디에 있니?”
멀 리서 희미하게 승연이를 부르는 구슬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승연이는 잠수를 해서 구슬을 찾아 보았어요. 저기 연못 바닥에 구슬이 힘없이 반짝이며 있었어요. 승연이는 있는 힘을 다해 구슬을 향해 다가갔어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드디어 가까스로 구슬을 손에 쥐었는데, 승연이는 그만 힘이 빠져서 정신을 잃고 말았어요. 가물가물 정신을 잃어가고, 물고기들이 옆을 스쳐간다고 느꼈는데, 어렴풋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승연아, 승연아. 어서 눈을 떠봐.”
“응응... 구슬아, 너니? 너 괜찮은 거야?”
어렵게 눈을 뜨면서 승연이는 정말 깜짝 놀랐어요.
세! 상! 에!
억수같은 빗줄기를 뚫고 승연이의 몸이 점점 떠오르고 있었어요. 손에 들었던 유리 구슬은 빗속에서 찬란한 빛을 내품고 있었구요.
“ 승연아, 착한 승연아. 넌 지금 연못에서 승천하고 있는거야. 너 덕분에 난 여의주가 되었단다. 네가 아니었다면 난 그저 평범한 유리 구슬로 평생을 살았을거야. 이제 넌 많은 것들을 마음 먹은 대로 할 수 있을거야. 그 능력을 어려운 친구들을 위해 써야 해.”
“알았어. 유리 구슬아, 아니, 여의주야. 잊지 않을게.”
승연이의 얼굴을 때리던 빗줄기가 가늘어진다 싶더니 점점 빛으로 바뀌어가고 있었어요. 푸른 하늘에 환한 빛이 되어 승연이는 자꾸만 자꾸만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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