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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있는이야기

나와 다른 것을 받아들이는 사회(홍세화)

by 소꾸호 2005.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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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다른 것을 받아들이는 사회


"교회 다니는 집안 아들이 불교 집안 여자를 좋아한다며?"


굳이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한번쯤 들어보았음직한 말이다. 독실한 기독교인은 물론 비기독교인조차 기독교인과 다른 종교를 가진 남녀 간 사랑에서 불가능이나 불화를 예감한다. 이 불화나 불가능은 다른 종교인이 기독교로 개종을 받아들일 때에만 비로서 제거될 수 있다. 이 때 기독교로의 개종은 단순히 같은 종교를 갖는다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진리의 편, 선한자의 편이 되기를 선택한 의로운 일이 되며, 하느님 나라의 승리와 나의 승리를 의미한다. 우리 일상 속에서 나와 다른 것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는 향용 적대적 가치의 대립물이 되며 따라서 극복 대상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나와 다른 두 개, 세 개가 서로 다른 두 개, 세계인채로 공존하는 것을 몹시 불편해한다. 이 불편한 심기가 성숙하지 못한 집단 의식과 만나, 나(우리)와 다른 너(너희)를 편향된 기준으로 규정하고 분리한다. 옳은 쪽과 그런 쪽, 선한쪽과 악한쪽, 정상과 비정상, 내(우리)쪽과 네(너희)쪽으로, 이러한 과정의 반복은 '다르다(different)=틀리다(wrong)' 등식을 우리의 무의식 속에 고착시켰다. 사회 구성원들의 이성적 성찰이 부족한 탓인데, 이 '다르다=틀리다'의 등식을 온존, 강화시키는 악순환을 거듭하게 된다.


우리는 이 등식을 허물지 않으면 안된다. '똘레랑스(tolerance)' 사상은 우리의 '다름=틀림'의 등식을 허물기 위한 적절한 무기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등식, 곧 '나는 선이고, 너는 악이다.'라는 적대적 선악관계로 증폭 연결된 이 등식이 불러일으킨 인간 행위에 대한 반성적 성찰의 산물이 바로 똘레랑스 사상이기 때문이다. 15세기까지 가톨릭으로 통일되어 있던 유럽 땅은 신교가 등장하면서 신구교 간의 피비린내 나는 분쟁의 장으로 바뀌었다. 같은 하느님의 자식이면서도 적대적 선악관계에 매몰되어 상대방을 잔인하게 학살하고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행위를 통하여, 이성에 눈 뜨지 못한 인간이 차이를 빌미로 언말나 잔인해질 수 있고, 집단 광기로 나아갈 수 있으며 무지한 맹목으로 치달을 수 있는지를 반성하고 성찰하는 것이 곧 똘레랑스이다.


똘레랑스란 '나와 다른 남을 다른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인간 이성의 소리'이다. 곧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의 자유에 대한 존중, 그리고 다른 사람의 정치적 종교적 견해에 대한 존중을 뜻한다.


이성에 눈 뜬 사람은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났을 때, 서로 좋은 점을 공유하려고 노력한다. 반면 이성에 눈뜨지 못한 사람들은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났을 때 누가 더 우월한지 견주려고 한다. 이성에 눈 뜨지 못한 인간의 저열한 속성은 나와 다른 남과 비교하여 내가 우월하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만족하는 것이다. 똘레랑스가 이성의 목소리를 요구하는 까닭이 바로 이 점에 있다.


단군 상의 목을 친다거나 아무런 이유 없이 사찰에 페인트칠을 하는 행위는 분명 반 이성적인 행위이다. 이는 나와 다른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는 정신자세가 불러일으킨 것으로서, 루소가 말한 "자기가 믿는 모든 것을 믿지 않으면 선의의 인간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자기와 똑같이 생각하지 않는 모두에게 냉혹한 저주를 내리는 앵똘레랑스(똘레랑스의 반대)한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몽테뉴는 "진리를 지킨다고 열의를 보이는 사람들은 실상 자기애와 오만을 보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존 로크 역시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들을 자신의 견해에 동의하도록 강제하는 것은 자부심과 자만심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신앙의 다름은 사람들에게 나와 남의 관계를 우월관계보다 선악관계로 증폭시키는 위험을 안고 있다. 나는 선인데, 남은 악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선악 구분은 사회 구성원들의 이성의 성숙단계가 낮을 때 사상의 다름에 대해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내 사상이 옳고 너의 사상이 그르다.'는 정도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내 사상은 선인데, 너의 사상은 악'이라는 것이다. 악은 이 사회에서 없어져야 한다. 따라서 감옥에 처넣거나 죽음을 강요한다. 국가보안법은 이 점에 대한 성찰은 요구한다. 국가보안법은 분명 한국 사회에 사상적 반신불수 상태에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과 그만큼 이성의 성숙 단계가 아주 낮은데 머물러 있다는 것을 증언한다.


"나는 당신의 견해에 반대한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그 견해를 지킬 수 있도록 끝까지 싸울 것이다." 18세기의 계몽 사상가 볼테르의 이말은 나와 다른 사상에 대한 똘레랑스를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나와 반대되는 견해를 죽이고자 끝까지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 견해가 지켜질 수 있도록 끝까지 싸우겠다는 그의 선언은, 나와 반대되는 의견을 죽이고자 노력하는 한국 사회, 곧 국가보안법을 여전히 꿰차고 있는 우리에게 왜 그래야만하느냐는 물음을 제기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부싯돌은 부딪쳐야 빛이 난다." 서로 다른 견해가 표현되어 부딪칠 때 진리가 스스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나와 다른 견해의 정당성을 밝히는데에도 옳지 못한 행위가 된다는 것이다.


17세기 인문주의자인 바나주 드보발은 "견해의 대립을 통해 이성을 눈뜨게 하지 않으면 인간을 오류와 무지로 몰아가는 자연적 성향이 지체없이 진리를 이기게 된다." 고 말했다. 이것이 21세기 초 한국 사회의 모습을 설명해주는 것은 아닐까?


특히 똘레랑스 사상이 결여되어 한국사회의 이성의 성숙 단계가 아주 낮은 데 머물러 있다는 점은, 선택할 수 없는 출생지의 차이에 대해서도 차별하고 시비를 걸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무릇 사람은 죽어서 누울 자리는 선택할 수 있으나 단 한 사람도 자기가 태어나는 자리를 선택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지리산 이 자락이냐 저 자락이냐.'가 대단히 중요한 문제가 되고 일생동안 따라다니는 천형처럼 받아들여지게도 된다. 이렇게 선택할 수 없는 차이조차 차별, 억압, 배제의 근거로 할 수 있다면, 최종적으로 사회구성원 각자가 선택하는 신앙이나 사상의 차이를 차별, 억압, 배제의 근거로 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똘레랑스는 관용이라기보다 화이부동(和而不同, 함께 평화로우나 같지 않다)이다. 관용에는 남이 저지른 잘못이나 실수를 너그러이 봐준다는 뉘앙스가 담겨있다면, 똘레랑스는 잘못이나 실수가 아니라 다름이 전제된다. 이 점에서 똘레랑스는 화이부동에 아주 가깝다고 할 것이다.


한국 사회의 고질병인 지역주의를 극복하고 분단을 극복하고 평화적 통일을 전망하려면, 나와 다른 사상, 체제, 이념, 신앙, 출생지, 성징, 피부색을 다른 그대로 받아들이는 똘레랑스 사상이 중요한 사회적 가치로 정착되어야 한다. 그 때에 이 사회는 수직적 사회에서 수평적 사회로 바뀔 수 있을 것이며, 획일적 사회에서 다양성이 꽃피는 사회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copyright 2005 홍세화
출처 : 경향잡지 2005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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