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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인연

7. 새로 대학을 가다

by 소꾸호 2020.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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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은 아직 완전히 여행 자유화가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군대를 가지 않은 사람이 여권을 발급받기 위해서는 “유학생자격시험”이라는 외국어시험을 통과해야 여권이 발급이 되었다.

 

일본어공부를 하러 아버지를 따라 일본에 가려고 했는데, 일본에 가려면 일본어시험에 합격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

 

주변에 다 떠벌려놓은 상태에서 나 시험에 떨어져서 일본 안가기로 햇어 이런 상황이 안되려면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일본에 가는 날이 얼마남지 않았을 때 였다.

 

친구에게 전화가 와서 좀더 본격적인 공부를 위해 지금있는 자취집에서 학원가가 있는 노량진쪽으로 자취를 옮기기로 했다고. 당연히 내가 해야하는 일인것처럼 나는 그럼 내가 도와줄께라고 약속을 했다.

 

이사날. 

 

얼마 안되는 짐이지만, 작은 트럭을 불러 짐을 실은 후, 기사님과 셋이서 앞에 타고 가면서 새로운 자취집으로 이동을 하면 어떤 생각을 했었을까? 아마 이렇게 같이 이후에도 여러번 이사를 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겠지..

 

동작구청앞 육교 맞은 편 하숙집에 짐을 내려주고, 자취집 앞에서 같이 저녁을 먹는 것으로 일본 가기 전 마지막 만남을 의미있게 보내게 되었다.

 

 

자유총연맹에서 하는 여권발급을 위한 소양교육을 마치고, 가까스로 받은 유학인증서로 여권신청을 하여 여권을 받았다. 내가 받은 여권은 녹색여권이 아닌 파랑색표지로 된 '외교관여권'.  아버지가 발령받은 근무지가 오사카총영사관이라 나도 덕분에 외교관여권을 가지고 출국을 하게 되었다.

 

 

드디어, 외로운 일본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일본어공부만 하려고 갔으나 가서 보니 일본은 많은 유학생을 확보하기 위하여 유학생에게 매우 좋은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국공립대학은 외국인에게눈 전액 수업료를 면제해주고 장학금제도도 잘 되어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다니던 일본어학교 교장선생님의 권유로 유학생들을 위한 시험을 준비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여권을 받기 위해 준비한 일본어공부도 도움이 되었고, 아직 학력고사를 본지 2년밖에 지나지 않은 유리한 점도 있어 나는 운 좋게 그 다음해 신입생으로 일본에 있는 대학에 진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서울에 있던 친구에게서도 편지가 도착했다. 노력한 결과가 결실을 맺어 다행히도 사범대학에 진학할 수 있게 되었다고.

 

서로 진심으로 축하해주며, 앞으로 서울에서 오사카에서 각자 열심히 살자고 그렇게 격려를 하였다.  우리는 서로 약속하지 않았는데도 다시 90학번으로 새출발을 하게 되었다.

 

 

이 후, 각자 새로운 생활에 몰두하게 되어 이전과 같이 자주 연락을 하지는 못했지만 대전과 서울에 살던 것처럼, 서울과 서울에 살던 것처럼 가끔 편지로 서로의 소식을 전했다.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편지들이 왔다갔다하며 서로 인연의 끈을 놓지 않고 그렇게 각자의 삶을 살았다. 

 

지금 기억나는 편지는, 

새마을중앙본부부터 같은 반이고 서울로 올라와 대학을 다니며 같이 친하게 지냈던 울산친구 익주가 큰 비가 내리는 날 집에 가다 교통사고로 하늘나라로 갔다는 소식.

제도가 바뀌어 공립학교의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임용고시를 봐야하기 때문에 많이 준비를 해야 될 것 같다는 내용정도가 기억에 남아있다.

 

그러던 중 서로 연락이 조금 뜸해지기 시작했다. 서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시점이었을까? 아무도 구속하지 않고, 선언도 안했지만 서로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하기가 미안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버지가 한국으로 귀국을 하며, 나는 일반여권으로 변경작업을 하였고 작은집으로 이사를 하여 혼자사는 생활을 시작했고, 그 시점에 자연스럽게 더이상 친구와의 연락은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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