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생각저생각/편지

편지(5)

by 소꾸호 2004. 1. 4.
반응형

5.

할아버지는 정원을 손질하고 계셨다. 엄마는 그 할아버지 옆에서 무언가 심각한 이야길 하고 계셨다. 아마 집이야기일 것이다. 엄마는 이제 아파트로 이사하고 싶다고. 공주도 몇 년 전부터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하여 도시의 편리함을 알리고 있다. 엄마는 아파트로 이사를 가고 싶어했다. 불걱정 문단속 걱정을 더 이상하기 싫다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시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엄마를 나는 이해한다. 할아버지는 반대시다. 유일한 낙인 정원이 없어진다는 일에.

난 아무래도 좋았다. 엄마의 그 동안의 노고, 할아버지의 얼마 남지 않은 인생들을 생각한다면 나는 누구의 편도 들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찾아왔다. 복덕방 아저씨이다. 집을 보러가자고 엄마는 나에게 이야길했다. 토요일. 어쩌면 이은주란 사람이 찾아올 지도 모르는데. 할아버지는 노골적으로 복덕방아저씨를 무시한다. 너가 달콤한 말로 이사를 권유한다고 오해라도 하고 있는 듯.

 

"할아버지, 다녀올께요."

"그래. 내 의견이 뭐 어디 먹혀나 들겠니. 네 에미 뜻대로 결국 되겠지."

 

할아버지는 기운이 없어 보였다. 엄마와 나는 복더방아저씨의 차를 타고 집을 보러 나갔다.

 

 

공주. 역사책에서 옛 백제의 도읍이었다는 기억만을 가지고 내가 사랑했던 사람의 학교가 있었다는 기억을 가지고 지금 찾아간다. 태호가 운전을 해 주었다. 자기 볼 일도 있다고 하면서 나를 데려다 주고 자기는 볼 일을 보러 간다고.

금강을 건넜다. 나는 지금 누굴 만나러 온 걸까? 김정민. 어떤 김정민. 내가 사랑했던 아니면 나의 편지를 받아주었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우체부 아저씨가 지나간다.

 

"아저씨 교동이 어디에요?"

"여기에요"

"아 그래요. 200번지 어딘지 아세요?"

"저기 파란 대문 보이죠? 저기가 200번지에요. 어 그 집 따님 아니세요?"

 

나를 보고 우체부 아저씨가 그렇게 이야기했다. 파란 대문 앞에서 써있는 문패는 김정민이의 것이 아니었다. "김성호" 아버지의 이름일까? 초인종을 눌렀다. 할아버지가 우리를 맞아주셨다.

"김정민씨 계세요?"

"정민이는 방금전에 지 에미랑 나갔는데. 누구슈."

난 누구일까?

"친구에요.언제 쯤 들어올까요?"

태호가 내가 주저주저하자 내 대신 대답을 해 주었다.

"방금전에 나갔으니까 세네시간은 걸릴거요.게는 시집갈 나이가 다 됐는데도 맨날 지 어미랑만 다니니"

시집? 태호와 나는 너무 놀랬다. 그럼 정민이는 여자였단 말인가.

"네 그럼 다시 찾아 뵐께요. 안녕히 계세요."

 

태호와 나는 차가 있는 데까지 걸으면서 서로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세상에 김정민이란 사람은 남자였단 말인가. 그러고보니 김정민이란 이름은 여자일 수 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태호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잠깐 나 편지 좀 쓸께. 아무래도 안 만나는 게 좋겠어. 그냥 여기서 편지쓰고 서울 올라갈래."

 

김정민님 보세요.

방금 전에 김정민님 집에 갔었어요. 오늘 새로운 사실을 알았어요. 김정민님이 여자라는 사실을. 사실 제가 찾던 사람은 남자였거든요. 그리고 저의 애인이었구요.

한 번 뵐려고 했는데 그냥 서울에 올라가기로 했어요. 전 정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왔거든요.

혹시 제 남자친구였던 그 사람의 추억이라도 잡아볼려구요. 근데 아마 아무 관계가 없는 분 같으시네요. 세상엔 참 우연이란게 가끔 있는 것 같애요.

이젠 편지 안 드릴께요. 그동안 폐를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이은주드림.

 

편지를 김정민의 집의 우체통에 넣고 나는 호텔로 갔다. 태호는 볼 일이 있다고 하면서 잠깐만 기다리라고 했다.

태호가 호텔로 나를 데리러 온 건 5시가 되어서였다.

"공주중학교에 가보자."

"공주중학교?"

"응. 은주가 본 졸업앨범의 그 학교. 어차피 아무 소득도 없이 돌아갈 순 없잖아."

"그럴까?"

 

태호는 미리 공주중학교를 조사해서 온 듯 아무런 주저함없이 운전을 했다. 교사와 운동장, 축구

골대 보통 중학교와 하나 다를 것 없는 이 학교에 나는 왜 온 것일까. 운동장을 걸어보았다. 정민이도 같은 땅을 걸었었을까? 어떤 교실에서 공부했을까? 무슨 생각을 하면서 시간들을 보냈을까? 공부는 잘 했었을까? 또 눈물이 나왔다.

"왜 요즘엔 이렇게 눈물이 많이 나오지?"

태호는 말이 없었다. 아직도 정민이를 잊지 못하는 나에게 무언의 항의를 하는 것일까.

차를 돌려 학교를 막 나올려고 하는데 태호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어! 저기봐. 은주랑 너무 닮은 애가 지나간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 사람의 모습은 뒤 밖에 볼 수 없었다.

"에이. 장난 치지마."

"정말이라니까. 너무 똑같앴어."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태호가 소개시켜 줄 사람이 있다면서 주최하는 전람회에 나를 초대했다. 한 쪽 다리를 조금씩 절면서 느즈막하게 나타난 정민은 아무 말도 없었다. 난 정민이의 눈빛이 좋았다. 나를 처음 본 후 그는 똑바로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났을 때 나에게 첫 눈에 반했다며 자기와 사귈 수 있겠냐고 했다.

난 첫 눈에 반했다는 말을 믿진 않았지만 진지한 자세와 나를 좋아해 줄 것 같은 마음에 성급할 지도 모를 결정을 해 버렸다.

그게 우리의 만남의 시작이었다.

댓글